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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log

걸을만큼 걸으면

by 물빛...물.들.다. 2020. 12. 20.

[걸을만큼 걸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는 길을 묻는 앨리스에게 "걸을만큼 걸으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주 아주 오랫만에 내가 종종 '아부지~'하고 부르는 새벽달샘과 하염없이 걸었다.
오래 걷는 길에는 대부분 함께 하셨던 분의 연락이기에 반가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애초에 걷기로 작심을 하고 성사된 약속인지라 으례 그랬듯이 신발을 잘 챙겨 신고 최소한의 짐을 꾸려 나섰다. 샘이 궁금해 하시는 혹고니도 알현할 요량으로 장비도 차곡차곡 넣었다.
길이야 외길이니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만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을 걷자니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면서도 자꾸 의구심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찾아 걷는 건 불확실한 인생과 닮아서라는 이유가 잘 느껴지는 순간이다.

삶을 먼저 살아내고 있는 이의 지혜를 들으며 걷는 길에 덤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받는다.
검은목논병아리 떼지어 자맥질 하고, 구름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는 호수는 하늘빛 그대로 담겨 있다.
멧도요인지 꺅도요인지 풀섶에서 휘리릭 뒷꽁무니만 보이고 잽싸게 날아가 버린다.
그래도 밭종다리가 어인 일로 눈 앞에 앉아주신다.
마른 잎새 사그러지는 관목들 사이로 번갈아 숨어다니는 촉새와 쑥새소리가 정답다. 소란스럽고 잰 오리들의 유영 가운데에서도 유유히 다니는 고니들의 자태는 여전히 우아했다.

어느 길목의 나무가 제일 알록달록한지,
어느 모퉁이에 떨어지는 아침햇살이 예쁜지,
어느 다리 위가 높은 플라타너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인지, 어느 숲 언저리에 많은 새들이 찾아오는지.
멈춤의 길목을 알아내는 일은 걸어야만 가능하다.
내가 걷다 멈추는 길목들에는 항상 아름다운 것들만 놓여있으니 나는 분명 어마무시한 복을 받았음이 자명하다.
신이 정말 잘한 일이 있다면 자연을 누구에게나 마주할 수 있도록 펼쳐놓은 일이 아닐까. 그 덕에 하등 보잘것 없는 내가 아무 조건도,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이런 풍경에 시선을 둘 수 있으니 말이다.

걷는 일에는 이력이 났다고 자신했지만 너무 간만이었나 보다. 종일 24km를 걸었고 그 덕에 묵직해진 종아리와 근육통을 얻었다.
토끼의 말처럼 걸을만큼 걸으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고, 내 삶도 걸을만큼 걷다보면 알게 되겠지.
모든 걸 곱씹어 되새김질하다 제자리로 돌아온 하루다.


#Monolog #일상 #탐조 #종일걷기 #삶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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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고니 #혹고니 #청둥오리 #밭종다리 #백할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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