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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잇는 글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깃든다.(조송희)_200708

by 물빛...물.들.다. 2020. 7. 14.

p35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시간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시간들이다.

 

p73

내 숨소리가 한의 숨소리같고, 내가 산인지, 산이 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내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고 산이 나를 오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내가 나를 오르고 있다. 아러다가는 산이 없어지고 나도 없어질 것 같다.

 

p89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할 궁리부터 하고, 어렵거나 힘든 일은 시도초자 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미리 포기하면서 나는 집착 잩은 건 안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속였다. 

 

p110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세상과 나의 내면으로 함께 뻗어있었다. 살핏줄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다보면 내 발걸음도 나도 모르게 마음 깊숙한 곳에 닿아있었다. 한동안은 여행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울고, 외로워서도 울었다. 이유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때도 있었다. 여행은 내 감정의 출구였으며 배수구였다. 묵은 상처의 찌꺼기들이 여과 없이 몸을 타고 올라와 눈물로 흘러내렸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만난 어린아이, 오래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난생처음 울어보는 것처럼 마음 놓고 울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마음의 독소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p141

장례식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데도 이 광경을 보려고 이렇게 먼 길을 달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타는 시체 옆에서 염소 두 마리가 시신을 덮었던 붉은 꽃을 우물우물 먹고 있다. 검은 소들이 긴 우기 동안 잔뜩 부풀어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누런 개 한 마리가 가트 위에 앉아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상주들도 화장터의 일꾼들도 말이 없다. 이곳의 사람들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존재들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윤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요한 한낮이다. 이곳에는 물과 불과 흙과 바람이 한 몸이 되어 떠돈다. 삶과 죽음, 사람과 짐승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에게 깃든다.

p175

역사도 길과 다르지 않다. 태어나고, 늙어가고 마침내는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그 시간들도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우리의 발걸음 속에서 어느 순간,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다. 175

p209​

삶도 그렇다 가끔은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도무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도 있다. 분명 내 인생인데 내 운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느낌, 내 운명을 누군가가 움켜쥐고 뒤흔드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의미없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존재의 뿌리가 흔들렸던 날들 조차 나를 키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운명의 주인은 운명이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내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든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 

p227

헨티 아이막에서 내 몸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별처럼, 들풀처럼, 강물처럼 사는 것임을 알았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때로는 반짝이고, 때로는 젖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흐르며 지내는 삶을 내 영혼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일주일 동안 나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온전한 나 자신이었다.

 

p259​

스티브 잡스가 "커넥팅 도츠(Connecting dots)라는 말을 했다. '인연은 낯선 곳에서 시작되어 나도 모르는 곳으로 이어져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이 발걸음이 내일 또 어떤 곳으로 나를 이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길은 길로 이어지고, 인연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진다는 것을.